선생의 생가 터, 양구읍 정림리에 세워졌다. 선생이 처음 ‘그림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곳이다.
이 곳의 풍경은 선생의 그림에 어떤 원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.
“대지에 미술관을 새겨나간다.” 대지를 뒤로하고 돌아섰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말이었다.
“....박수근의 그림은 그려진 것이기보다는 새겨진 것이다. 나타낸 것이기보다는 드러낸 것이다. 그의 matiere는 화면 전체를
장악하고 있으며 그리려는 뜻은 matiere 속에서 함께 작동되고 있 다.....’ 메모는 계속 되어나갔다.
이 미술관 자체가 선생과의 만남을 만들어내는 통로이어야 한다.
그것은 선생이 경험했을 풍경(현상적 경관)을 매개로 이루어진다. 건축은 그 매개과정을 조율한다.
그러기에 이 미술관은 유물, 유품, 그의 그림 이전에 건축 그 자체로써 매개의 장치가 되고자 한다.
먼 진입로에서 산줄기의 끝자락을 감아 도는 미술관 자체의 덩어리에서 경험은 시작된다.
한 두자 크기로 부수어진 화강석 덩어리가 다시 큰 덩어리와 면을 이룬다. 화강석들은 사이사이 가 시멘트 몰탈로 채워지지 않은 채
쌓여져 있다. 그림의 마티에르와 건축의 마티에르를 본다. 긴 진입로를 휘감아 돌아 들어간다. 선생을 만나는 길이 쉽고 짧아서야
되겠는가? 멀리서 보았던 화강석 덩어리를 손끝으로 느끼며 간다.
돌아 들어간 끝에는 뒷산과 하늘로만 열린 마당이 나타나고 그 사이를 냇물이 흘러간다.
이 곳은 건축의 경험이 ‘선생을 기리는 마음’으로 올라서는 장소이다. 선생의 모습도 조각되어 있다.
선생과의 경험은 선생이 보여준 삶에 대한 이해와 함께 우리에게 어떤 충동으로 작용되기를 바란다.
양구군은 미술관 옆 골짜기 수 천평을 추가로 확보했다.
이 곳에는 미술관을 통해 자극된 일상의 생활들; 미술작업, 워크샾, 체류 등등의 직접적인 체험이 가능한 장소로 계획되어 나갈
것이다.
결국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은 많은 다른 지자체의 1회성 사업과 달리 꾸준한 내용을 가지고 전개되 어 나갈 것이다. 더구나 전례없이
전임 큐레이터도 확보했고 의욕적인 명예관장이 위촉되었으며 지혜로운 선양위원회가 계속 힘을 실어주고 있으니.....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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